관음죽을 좋아했던 어느 사모님

category 굿모닝, 지리산 2020. 11. 12. 23:04,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84년부터 고향인 고창을 떠나 2009년 2월 15일까지 서울생활을 했다. 대학 합격은 턱걸이로 겨우 했는데, 재수하면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라는 가족들의 지원으로 노량진에 있는 입시학원을 며칠 다녔다. 애당초 대학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다시 공부라니 그냥 공부가 싫었다 좋은 대학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무슨 인생의 목표라든지 그런 것도 뭐도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집을 나왔다. 그동안 부모님 아래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만 자랐으니 그냥 밑바닥부터 고생이라는 것을 하면서 무언가를 찾아보고 싶었다.
무작정 을지로 중부시장 동아일보 보급소에서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하지만 형의 친구들에 잡혀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해야만 했다. 집에 며칠 박혀있다가 다시 가출 서초동 농원에 취직을 했다.



84년 그 시절에는 서초동 지금 검찰청이 있는 마을을 개꽃 마을이라 불렀다. 전철 2호선은 다녔지만, 서초역에서 교대역까지는 꽃집과 비닐하우스가 늘어서 있었다. 법원과 검찰청 등이 들어서면서 꽃집들은 이주비용을 받고 양재동으로 밀려가던 시절이었다.
농부가 장래희망이었던 나는 본능적으로 식물을 좋아하는 DNA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1주일 만에 400평이 넘는 농원 안에 있는 식물 이름과 가격이 자동으로 다 외워졌다. 고등학교를 인근 고창에서 가까운 정읍농고를 가려했으나 부모님의 반대로 좌절되어 집에서 가까운 해리면에 있는 인문계 해리고등학교를 다녔다. 1~2학년 시절은 못된 반항심으로 공부는 일부러 외면했다. 대신 농사지으려면 신문이라도 읽어야 해서 한문공부만 열심히 하면서 보내다가 고3, 공부 조금 했는데, 대학에 합격하니 집에서 재수를 권했던 것이었다.
서초동 생활은 꽃집에서 일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낮의 피곤함을 술로 달래면서 바퀴벌레와 동거하며 비닐하우스에서 숙식하면서 생활을 했다.
하루는 시골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찾아오셔 공부 안 하고 꽃을 키우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래 열심히 한 번해보라고 격려해주시곤 안심하신 듯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그리고 나의 주량은 늘어갔고, 서초동엔 친구들이 하나둘 늘어가고 낙엽이 물들기도 전 어느 날, 유명한 코미디언 사모님이 선글라스를 거만하게 소파에 내려놓고 앉더니 무늬 관음죽을 산다고 이것을 가져와라 저것을 가져와라 반말로 야! ~ 목소리가 올라간다. 갓 스무 살 자식보다도 어린 아이라 막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다섯 번 정도 참았던 같다. 시골에서 사회성도 없이 자란 내 성격은 끝내 참아내지 못하고 "당신 같은 분한테는 팔고 싶지 않을 테니 나가세요"라고 하고 쫓아내버렸다. 사장님은 손님 앞에서 내 편을 들어줄 수 없어 나를 혼내면서 단골인 그 사모님한테 죄송하다는 인사를 여러 번 하고 일은 마무리되었다. 그 일로 나는 농원 일을 그만두었다. 송별회 하던 날 개꽃 마을 친구들과 어울려 서초동이 울려 퍼지도록 소리 지르며 맥주를 몇 박스는 마셨다.

그리고, 다시 노량진으로 나는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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